2018년 04월 27일 맑음
전주 경기전, 전주향교 한옥마을 청연루 오목대 전동성당 풍남문 - 나홀로
전주 출장 업무를 마치고 전주향교와 한옥마을, 청연루를 건너 오목대에서 전주 한옥마을을 내려다 보면서 전주 한옥마을을 감상해본다. 전동성당으로 이동하여 전동성당을 잠시 산책을 하고 인접해 있는 풍남문을 한 바퀴 돌면서 웅장한 규모와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는 풍남문을 감상해 본다.
전주한옥마을[ 全州韓屋─ ]
1977년 한옥마을 보존지구로 지정된 뒤 전통한옥지구·전통문화지역·전통문화구역·전통문화특구 등으로 불리다가, 2002년 10월 '전주시 공공시설 등의 명칭 제정위원회'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전주시 완산구 교동(校洞)·풍남동(豊南洞) 일대 7만 6,320평에 700여 채의 전통 한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마을은 일제강점기 때 성곽을 헐고 도로를 뚫은 뒤 일본 상인들이 성 안으로 들어오자, 이에 대한 반발로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현재까지 당시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문화공간으로는 판소리·춤·타악 등 전통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전주전통문화센터, 막걸리·청주의 제조과정 관람과 시음까지 할 수 있는 전주전통술박물관, 숙박을 하면서 온돌과 대청 마루 등 한옥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전주한옥생활체험관, 전통 공예품을 전시하는 전주공예품 전시관 및 명품관 등이 있다. 또한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慶基殿:사적 339),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연회를 열었던 오목대와 이목대, 한국 천주교 순교 1번지인 전주 전동성당, 전주향교 등의 문화유적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주한옥마을 [全州韓屋─]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전주천 건너편에 있는 전주향교를 바라보고
오목교를 건너 갑니다.
뒤돌아 본 국립 무형유산원
오목교를 건너며 멀리 청연루를 바라보고
유유히 흐르고 있는 전주천
한옥들이 즐비합니다. 향교에서 한옥천으로 쭉 이어져 있지요.
오목교를 건너왔고, 뒤로 보이는 산은 남고산
전주 향교문화관, 여기서부터 향교입니다.
만화루를 들어서면
전주향교는 전북 전주시 완산구(完山區) 교동(校洞) 26-3번지에 있는 조선 초기의 향교이다.
1992년 12월 23일 사적 제379호로 지정되었으며, 면적은 1만 357㎡이다. 본래 1410년(태종 10)
완산구 풍남동(豊南洞)에 있는 경기전(慶基殿) 부근에 지었으나 1603년(선조 36) 관찰사 장만
(張晩)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대성전(大成殿)·명륜당 등 16동의 건물이 있으며, 전국 향교 중
유일하게 공자 ·맹자 ·증자 ·안자의 아버지 위패를 봉안한 계성사(啓聖祠)가 있고, 대성전 ·동무
(東廡) ·서무(西廡)에 51선현의 위패가 봉안되었다. 또 장판각(藏板閣)에는 《주자대전》
《성리대전》 《사기평림(史記評林)》 등 9,600여 점의 목판이 소장되어 있다.
전주향교 [全州鄕校] (두산백과)
일월문을 통과하고
공자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는 대성전이 나옵니다.
대성전 앞에서는 어르신들이 체험을 하고 있는 듯
저마다 진지해 보입니다.
대성전의 뜰, 좌 우에는 어마어마하게 큰 은행나무 2그루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네요.
대성전 왼쪽 보호수 수령이 1982년 지정 당시 350년이면 현재 400년이 다 되어갑니다.
나무둘레는 5.5m
대성전 오른쪽 보호수 수령이 1982년 지정 당시 400년이니
현재 436년이군요. 나무둘레는 10.4m로 단연코 제일 큽니다.
대성전에 들어서고
대성전
1971년 12월 2일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었다. 향교재단에서 소유하고 있다. 고려
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나 신뢰성이 없다. 구전에 따르면 향교가 있던 자리는 경기전(사적
339) 근처였는데, 경기전을 세우게 되자 주위가 번잡하다고 하여 1410년(태종 10)에 화산동
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뒤 선조 때 순찰사 장만(張晩)과 유림들이 지금의 위치로 옮겼으며,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이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건립 당시에는 서울의 성균관을 모방하여 대성전,
동무, 서무, 내삼문, 외삼문, 명륜당, 장판각, 제기고, 수복실, 계성사, 사삼문, 양사재(養士齋), 사마
재(司馬齋), 수직실, 만화루(萬化樓) 등의 건물이 99칸에 이르렀다. 현재 대성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무와 서무가, 정면에 일월문이, 그 앞에 만화루가 있다. 대성전 뒷담을 사이에 두고 명륜당이 있고
서쪽으로 장서각, 계성사, 양사재, 사마재가 있으며 주위에 고직사 등 여러 건물이 있다. 대성전은
1653년(효종 4)에 부윤 심택(沈澤)과 판관 한진기(韓震琦)가 중건하였으며 이기발이 중건기를 남겼
다. 명륜당보다 훨씬 뒤에 세워진 건물로 정면 3칸에는 널문을 달았으며, 기둥은 모두 두리기둥[圓
柱]이고 맞배지붕이며 양 합각에는 방풍판을 달았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주향으로 안영, 증자, 자사,
맹자 등 중국 4성과 10철, 송(宋)의 6현을 배향하고 있으며, 동무와 서무에는 공자의 제자를 비롯한
중국의 유학자 7명과 한국의 18현 등 총 25명을 배향하고 있다. 1904년에 중수된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로 좌우 1칸씩은 눈썹천장을 이어 달아 꾸몄으며, 전면에는 모두 널문을 달았다.
따라서 눈썹천장의 도리가 뺄목으로 되어 길게 뻗어 나와 있는데, 향교 건물을 이와 같은 구조로
짓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조선시대에 도호부의 관아가 있었기 때문에 학생수가 액내생(額內生)
90명, 액외생(額外生) 90명으로 총 180명에 정7품의 훈도 1명이 배속되어 사서오경 등을 가르쳤다.
전주향교 대성전 [全州鄕校大成殿] (두산백과)
대성전 내부에 모셔져 있는 공자 존영
대성전 뜰의 왼쪽과 오른쪽의 은행나무가
전주향교의 역사를 말해주는 듯 합니다.
명륜당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서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학생들이 사진을 찍고 있네요.
명륜당
명륜당의 뜰에도 보호수로 지정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어마무시해요.
현재 수령 416년, 나무둘레가 6.6m
계성사
대성전 뜰
전주향교 안내
전주향교를 모두 답사하고 거리로 나왔습니다.
한옥마을 방향으로 가는 중
한옥마을이 쭉 이어집니다.
민속벽화도 그려져 있군요.
전주 한옥마을 거리 풍경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갑니다.
분수는 시원하게 물을 뿜어 주고
경기전으로 통하는 길
낭만이 넘쳐나는 전주 한옥마을 거리이지요.
시원한 분수를 바라보며
한옥마을에서 벗어나 전주천으로 다시 나왔습니다.
청연루 안내
청연루
무지개다리
* 전주 한옥마을의 새로운 랜드마크 남천교와 청연루 *
전주시 교동 한옥마을과 서학동을 잇는 남천교, 그리고 남천교 위에 세워진 팔작지붕을 한 청연루가
‘전주 남천교 명품화사업’을 통하여 한옥마을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남천교
주변의 미관 향상과 한옥마을의 인프라 확충을 위해 인근 도로, 하천, 건물을 단계적으로 정비하고
있다. 남천교(길이 82.5m, 폭 25m)는 이 자리에 있던 옛 홍예교의 이미지를 살려 아치형 교량 구조
를 하고 있다. 다리 위에 세워진 청연루(晴烟樓)는 전주 8경 중 하나인 한벽청연(寒碧晴煙)인 한벽
당(寒碧堂, 누각)과 대칭적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청연루에 올라 앉아 동쪽을 바라보면 멀리
기린봉 자락에 자리 잡은 동고사가 아스라이 보인다.
* 전주천 상류 남천교 위에 세워진 팔작지붕 형태의 청연루 *
남천교 위에 기와로 지붕을 얹고 목재로 기둥을 세워 청연루를 만들어 놓았는데, 그 모습이 천년
고도다운 격조가 있고 고풍이 완연하다. 완산팔경 가운데 하나가 ‘한벽청연’이다. ‘한벽’과 ‘청연’을
대구로 사용해서 다리 위쪽으로 한벽루가 있으니, 아래쪽에다가 청연루를 지은 것이다. 다리 위에
이런 정자가 있으니 여름엔 아주 시원할 듯하다. 무지개 모양의 교각과 한옥 모양의 다리가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역시 전주는 한옥이 강세이다.
남천교 청연루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남천교
가장 한국적인 도시, 전주
국제 슬로시티 전주 한옥마을
전주천변을 걸어 주차장으로 이동합니다.
원점으로 돌아왔고, 이제 오목대를 올라보려 합니다.
오목대 입구의 전주한옥마을 표지석이 큼지막하네요.
푸르른 녹음 아래 계단을 잠시 오르면
한옥마을을 전망할 수 있는 전망대에 도착
이쪽 저쪽 한옥마을을 둘러 봅니다.
우뚝 솟은 첨탑은 유명한 전동성당이네요.
한옥마을 뒤로 펼쳐지는 고층건물도 어울려 보이고
전동성당을 당겨봅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한옥마을의 정겨움이 그대로 밀려오고
전주 한옥마을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고
이제 오목대로 올라섭니다.
오목대 전경
오목대를 향하여 발걸음을 옮겨가고
오목대의 누각과 비석을 보호하고 있는 비각이 어울려 줍니다.
오목대 누각과 비각
오목대는 고려 우왕 운봉 황산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이성계가 개선길에
잠시 머물렀던 곳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한제국 광무 4년(1900년)에
비석을 건립했는데 태조가 잠시 머물렀다는 곳이라는 뜻의 <태조고
황제주필유지>라는 비문은 고종황제가 직접 쓴 친필을 새긴 것이다.
오목대 비각
오목대
웅장한 규모의 오목대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오목대입니다.
오목대(梧木臺)
1974년 9월 24일 전라북도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되었다. 오목대는 1380년(우왕 6) 삼도순찰사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귀경하는 도중 승전을 자축하는 연회를 열었던 곳으로
1900년(고종 37) 고종이 친필로 쓴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畢遺址)’가 새겨진 비가
세워졌다. 경기전(慶基殿)의 남동쪽 500m 쯤 떨어진 곳, 나지막한 언덕에 위치하는데, 옛날에는
동쪽의 승암산에서 오목대까지 산이 이어져 있었으나 전라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맥이 끊겼다.
오목대에서 육교 건너편으로 70m쯤 위쪽으로 가면 승암산 발치에 이목대가 자리잡고 있다.
이목대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4대조 목조 이안사(李安社)의 유허(遺墟)로서 시조 이한(李翰) 때
부터 누대에 걸쳐 살던 곳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용비어천가》에도 묘사되어 있다. 이목대에도
고종이 친필로 쓴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가 새겨진 비가 오목대와 동시에
세워졌다. 오목대와 이목대는 모두 오래전부터 전주 시민의 휴식 공간이 되어 왔다.
오목대이목대 [梧木臺梨木臺] (두산백과)
오목대 누각 건립기
잘 보존되어 있는 오목대 비각
빨간 철쭉 뒤로 오목대 현판이 바라보이고
오목대에서 내려오다가 육교을 건너면 만나는 풍경, 도란도란 시나브로길
옛날스러운 곳, 오목대 탐방은 여기까지이고,
풍남문과 전동성당으로 이동을 합니다.
아름다운 전통의 전동성당
전동성당은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전동에 있는 천주교 성당으로 사적 제288호. 조선시대의
전주는 전라감영이 있었으므로 천주교회사에서 전동은 자연 순교지의 하나가 되었으며, 이 성당
은 바로 천주교인들이 처형되었던 풍남문(豊南門)이 있던 곳에 있다. 1891년(고종 28)에 보드네
(Baudenet)신부가 성당의 대지를 매입하고, 그 뒤 1908년프와넬(Poisnel)신부의 설계로 착공하여
1914년에 준공을 보았다. 벽돌로 된 완전한 격식을 갖춘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 건물은 서울의
명동성당과 외양상 유사한 점이 많으나 건축양식상으로는 상당한 차이점이 있다. 회색과 적색의
이형(異形) 벽돌을 사용하여 섬세한 모양을 꾸며낸 점은 같으나 반면에 아치의 모양이나 종탑의
양식은 전혀 다르다. 내부 열주(列柱)는 8각의 석주(石柱)로 되어 있으며, 정면 중앙의 종탑부는
12개의 채광창을 돌린 12각형 고상부(鼓狀部) 위에 12각의 총화형(葱花形)으로 된 둥근 지붕을
얹었고, 좌우에는 그보다 약간 작은 8각형의 고상부 위에 8각의 지붕을 얹었다. 두툼한 외부 벽체
와 반원 아치의 깊숙한 창이 로마네스크양식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고딕양식의 명동성당
이 내부 열주 사이를 뾰족한 아치로 연결한 아케이드인 데 반하여, 이 성당은 8각 석주 사이가
반원아치로 연결되어 있다. 초기 천주교 성당 중에서 그 규모가 크고 외관이 뛰어나게 아름답다.
이 성당은 건평 189평에 대지 4,000평이며, 전주 중앙본당이 1956년에 준공되기 전까지는
전주교구 주교좌성당이었다.
전주전동성당 [全州殿洞聖堂]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전동성당과 풍남문 앞 광장
전주 풍남문
'호남제일성'이란 현판이 걸려 있군요.
호남제일성(湖南第一城)
풍남문, 반대쪽은 '풍남문'이라 쓰여 있고
풍남문 안내
웅장한 규모와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는 풍남문입니다.
풍남문(豊南門)
전주 풍남문(全州 豊南門)은 조선 시대 전라감영의 소재지였던 전주를 둘러싼 성곽의 남쪽 출입
문으로 성벽이 헐린 후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문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308
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 관찰사의 소재지였던 전주에는 시가지를 둘러싼 성곽이 초기부터
있었으며, 그 성곽에는 동서남북에 각각 문이 있었는데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 때에 모두
파괴되었다. 성곽과 성문이 다시 수축된 것은 영조 10년(1734년)이며 이때 남문을 명견루라
하였다. 그러나 명견루는 1767년 (영조 43년) 큰 화재로 불타버렸다. 현재의 문루는 그 이듬해
에 당시의 관찰사 홍낙인이 재건한 것으로 풍남문이란 이름도 이때 붙인 것이다. 풍남이란 풍패의
남쪽에 있는 문이라는 뜻이다. 이는 전주를 풍패지향(豊沛之鄕)이라고 부른 것과 관련이 있다.
풍패(豊沛)는 한나라 고조 유방이 태어난 곳으로 조선왕조의 발원지인 전주를 그 곳에 비유한 것
이다. 북문은 패북문이라 불리었다. 순종 때인 대한제국 융희 원년(1907년)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성곽과 성문은 모두 철거되고 이 풍남문만 남게 되었다. 풍남문은 그 후 종각, 포루 등이 일부 헐리
고 지면이 묻히는 등 그 옛모습이 크게 훼손 되었는데 지난 1978년부터 3년간의 보수공사로 다시
원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다. 아래층 내부에 전후 두줄로 4개씩 세운 기둥이 그대로 연장되어 위층
이 모서리 기둥으로 사용이 되는데 이러한 기둥배치는 한국 문루건축에서는 희귀한 양식이다.
인근에는 태조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과 전주이씨들의 발원지인 오목대,
그리고 전주 객사가 위치하고 있다.
웅장한 규모와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는 풍남문을 한바퀴 돌아보았고
전동성당이 풍남문과 가까이 있어 연계 탐방이 되는 것이지요.
풍남문 광장
풍남문 광장에는 세월호 분향소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제와서 말하는 게 아니라 이제서야 말한다.
소녀상도 설치되어 있군요.
평화의 소녀상 안내
전동성당을 바라보며 오늘의 전주 한 바퀴 탐방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동하의 힘찬새발걸음 | 170911, 전주 덕진공원 한옥마을 경기전 전동성당 탐방의 날 - Daum 카페
'* 국내여행 * > 18년 국내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180522, 군산 선유도, 신시도 무녀도 선유도 장자도 대장도 여행 - 아내와 함께 (0) | 2018.05.25 |
---|---|
180428, 거제 외도, 해금강 해상관광과 외도 보타니아 탐방 - 탑스코 야유회 (0) | 2018.04.28 |
180421, 신안 증도, 짱뚱어다리와 태평염전의 유채밭 탐방 - 아내와 함께 (0) | 2018.04.23 |
180415, 9)첨단 쌍암호수공원의 활짝 핀 철쭉을 감상하며 - 아내와 함께 (0) | 2018.04.16 |
180415, 8)대관령 삼양목장, 평창 동계올림픽스타디움 - (주)율원엔지니어링 (0) | 2018.04.16 |